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아 우리는 3주째, 종교 개혁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점에서 종교 개혁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불행하게도 종교 개혁당시의 로마가톨릭 교회와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가 많은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에서 많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으로, 기복 신앙, 맘모니즘(물질만능주의), 세속주의가 교회에 들어와서 똬리를 틀고 앉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교권주의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를 마치 회사처럼 사유화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2 전에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말만 해서는 안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떤 권위도, 리더도 성경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 앞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엔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인 이신칭의 교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사람은 거기가 끝이 아니라 이제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서를 바꾸면 안됩니다. 먼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후에 행위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번째 시간으로써, 성경의 핵심 주제인 은혜 사상에 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은혜 어떤 신학자가 얘기한 것처럼,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없는, 오직 기독교 복음에만 존재하는 사상인 것입니다. 은혜는 추운 겨울 날의 따뜻한 햇빛과 같고, 봄에 만물을 소생케 하는 봄비와 같은 것입니다. 너무 좋은 것입니다.

세상에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심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은혜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귀한 것입니다.

은혜를 맛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은혜(Grace alone) 강조했을까요? 당시 중세 시대의 로마가톨릭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군대처럼 계급화 되었고, 구원조차도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누가 교회 권력에 도전하기라도 하면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파면당하고 심지어 화형까지 당하였습니다.

루터 이전에 영국의 개혁자인 위클리프는 최초로 영어 성경을 번역한 사람인데, 로마천주교에 비판적이었다고 하여 죽은 후에 무덤에서 꺼내져서  뼈를 다시 불태우는 부관참시까지 당했습니다.

보헤미야(지금의 체코) 개혁자 후스는 루터보다 세기 앞선 개혁자인데,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다고 하여,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했습니다.

 

율법주의야 말로 시대를 통틀어 가장 은밀하게 교회에 침투하는 무서운 사상입니다. 하도 은밀하게 자리잡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율법주의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 예수님의 비유 , 가장 길고, 가장 알려진 비유 하나입니다. 그러나 비유의 핵심 포인트를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로 알고 있고, 집나갔다 돌아온 탕자(둘째 아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야기를 주신 것은 집나간 둘째 아들에 대해 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은혜를 잃어버린 맏아들의 문제점 지적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조건 없이 베푼 아버지의 사랑(은혜) 설명하기 위해 주신 이야기인 것입니다. 형의 비은혜와 아버지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있는가?

이야기의 배경에 대한 기록인 15:1-2절을 보시면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무슨 이야기인가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사람들이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주신 비유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의 맏아들은, 동생이 돌아왔을 , 아버지가 환영 잔치를 베푼 사실을 알았을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기분이 상해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는 것을 비판한 것처럼, 죄인이요, 탕자인 동생이기 때문에, 동생이라고도 부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에게 보여준 은혜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밭에서 온종일 일하고 돌아오다가 자기 집에서 나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으니, 동생이 사라졌던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베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송아지까지 잡았다는 얘기를 듣고 몹시 기분이 상합니다.

그는 화까지 내면서 들어가지 않으려 하였고, 급기야는 아버지가 나와서 설득까지 합니다.

맏아들의 불만 섞인 말입니다. “아버지, 제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제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저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와 함께 삼켜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불평 불만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동생에 대한 호의를 비웃었습니다.

아버지 잔뜩 화가난 아들에게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것이 것이다 말씀은 너는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 은혜 속에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아무리 문제가 있는 동생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동생이요, 잃었다가 찾은 동생인데 환영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불쌍한 동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안되겠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맏아들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1)    자기 동생이 돌아온 사실에 대해 기뻐하지 않은

(2)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3)    아버지에게까지 화를 내고 불평한

(4)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은 ( 형은 자기 동생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당신의 아들-그것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다시 동생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호칭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호칭 때문에 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그렇다면 맏아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형으로서 동생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아버지가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대해 불만을 표했을까요?

형의 문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바로 율법주의, 또는 원칙주의인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어디나 존재하는데, 은혜를 무력화시키고, 기쁨을 빼앗는 나쁜 사상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잃고 율법주의에 빠지면, 도덕은 남는데, 기쁨은 사라입니다. 종교는 남는데, 관계를 깨집니다. 의무는 행하는데, 감사는 없습니다. 예배는 있는데, 감동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교회에 의무적으로 나오고,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비판적으로 보고 원칙만 따지기 때문에, 이야기 속의 형이 동생을 못마탕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형제 자매들의 모습이 비판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도 가나의 혼인잔치이셨습니다. 기독교가 은혜와기쁨의 종교임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나 즐기는 사람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11:19)

어떤 어머니가 딸과 함께 예배 드리러 예배당에 왔는데, 딸이 예배당에서 깔깔거리며 웃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얘야, 가룩한 예배당에서 웃느냐 나무랐습니다. 그래도 딸이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딸을 꼬집으면서 웃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번엔 아파서 아이가 울며 눈물을 흘리자,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래,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태도에 대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할 ,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축제와 같은 예배 받으시기 보다, 엄숙한 분위기의 예배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엄숙해야 때가 있지만 예배가 항상 엄숙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 찬양 예배 아이들이 춤을 추면서 찬양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집나갔던 아들이 돌아왔을 , 형의 태도와 아버지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요. 아버지는 은혜를, 형은 비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한 점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 잘한 점이 있다면 최악의 상황에서 자살하지 않고 아버지께 돌아온 것입니다. 세상에 불효 자식도 그와 같은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죽은 후에나 받을 있는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유산을 미리 주었고, 그는 전부 팔아서 아버지로부터 멀리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삽니다. 결국엔 탕진하고 나라에 흉년까지 들자 알거지가 되고, 돼지치는 일까지 하게 되고, 돼지가 먹는 죄엄열매도 없어서 굶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행인 것은 그가 아버지와 아버지 집을 기억하고, 돌아갈 것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와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 하나로 받아주세요라고 해야되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탕자가 예상한 것과 달리 아버지는 너무나 은혜로우셨습니다.

아들을 보자 아버지는 거리가 먼데도 달려가서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연습한 대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사실만으로 이미 용서했고,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종을 시켜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게 하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게 것입니다. (이미 용서했을 아니라 아들로 받아 주었습니다.)

요한복음3:16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은 측량할 없습니다.

2:4-6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야기의 아버지의 마음-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반복해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풍부하십니다.”(103:8)

그러나 형은 동생의 귀환에 대해 환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동생은 자신에 비해 도덕적으로 흠이 많고, 불효자식이고, 아무 것도 것이 없는 쓸모 없는 사람, 자격 미달이라고 보는데, 아버지는 은혜로 그를 기꺼이 받아 것입니다. 은혜가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중세 시대의 교회도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교회가 잃어버리기 가장 쉬운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대신에 율법주의가 자리잡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원칙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는 사람을 잣대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격을 논하고,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혜는 자격을 보지 않고, 조건도 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줍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법을 앞세우고, 은혜는 사람(영혼) 중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자격 조건을 걸었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1 달란트 빚을 탕감받는 자처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은 갚을 없는 양의 빚을 탐감 받았으면서도 그에게 데나리온 빚진 자를 참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겐 은혜가 아닌 비은혜로 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 속의 아버지처럼 은혜 충만한 , 아니면 은혜를 잃어버린 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확인하는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사죄의 은총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은총 중에 은총은 사죄의 은총입니다.

혹시 마음에 감사 대신에 불평과 원망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윗의 시를 인용하면서, 죄사함의 은혜가 가장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4:7-8,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할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게 찬송가 중에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가?

영원히 씻을 없는 죄가 사함받은 은총이 너무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같이 찬양을 부르면서, 혹시 우리도 살면서 은혜를 망각했다면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찬송가 305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2)    내가 은혜 안에 사는지, 아니면 비은혜의 법에 갇혀 사는지를 확인하는 하나의 질문은 내가 수용적인지, 비판적인지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의 특징- 자신에 대해선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위선적일 밖에 없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은 나쁜 아들이지만, 자신은 아버지에게 좋은 아들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집나간 아들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생을 받아주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 분노 속에 사는 맏아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탕자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3)    내가 은혜 속에 사는지 아니면, 비은혜의 법에 갇혀 사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형제자매들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살고 있는지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맏아들의 문제는, 동생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는 , 동생을 동생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신앙은 관계로 요약할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과 관계, 옆으로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이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동생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언제 가장 기뻐합니까? 자식들이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지낼 , 서로 우애 있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나 종교 개혁 당시의 중세 로마가톨릭의 심각한 문제 하나는 율법주의였습니다. 성경의 핵심적 사상인 은혜를 잊고, 비은혜가 지배하는 교회가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시대의 한국 교회가 중세 로마가톨릭처럼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차지해야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고, 성경을 말하면서 말씀엔 순종하지 않고, 은혜로 시작된 교회 안에서 은혜의 향기를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권주의, 계파주의,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은혜가 있나요? 용서,용납,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말하면서 정작 우리는 은혜와 상관없이 살고 있지는 않을가요?

여러분, 은혜를 잃어버리는 - 꽃이 향기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상 벌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은혜를 잃어버리는 -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꽃이 향기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꽃이라고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전도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 하나는 교회가 이상 은혜의 향기를 풍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도 세속적이 되고, 세상보다 비은혜가 판을 치는 곳이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싸우면 술을 마시며 풀지만, 교인들은 싸우면, 영원히 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얼마나 부끄러운 말입니까? 교회가 은혜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비난과 비판만 있습니다.

용서 없는 교회, 사랑없는 교회, 은혜 없는 교회- 향기 없는 꽃처럼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게 것입니다.

한편 은혜를 말하지만, 값싼 은혜인 경우도 많습니다. 값싼 은혜의 개념은 독일 신학가 본회퍼가 말했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 교회가 은혜를 얘기하면서 히틀러에 항거하지 않는 모습을 비판한 것입니다. 값싼 은혜란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용서해 주셨고 계속 용서해 주실 것이니, 계속 죄를 범해도 무방하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6:6)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입니다.(1:14)

(1)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습니다. 사람을 대하실 어떤 선도 긋지 않으셨습니다.

(2)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에게 정죄하던 자들을 돌려보낸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을 들어 치려고 했었습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용서 주셨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른 무리들,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불법 재판을 통해 예수님을 죽게 사람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그렇다면 다시 우리가 은혜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스스로 의롭게될 없는 존재였습니다.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되었습니다.

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믿는 복음 은혜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고 일생을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에 바쳤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은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내야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은 은혜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은혜를 원합니다. 조금 실수하고,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질책을 받고, 비난받고, 정죄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냥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도 은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조차 자격을 논하고, 비판받고, 무시받고, 정죄를 당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은혜를 회복하길 원합니다. 은혜로운 가정, 은혜로운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은혜의 향기를 풍겨나 달아났던 나비와 벌들이 찾아오게 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지친 영혼들이 다시 교회를 찾을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