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당시 로마천주교의 부패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마틴 루터가 용감하게 개혁에 앞장선 것은 그의 개인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1483년 독일 튀링겐의 아슬레벤이란 마을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아버지는 가난한 광부는 아니었습니다. 여섯 개의 갱도와 두 개의 주물 공장을 가진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엄격하셨는데, 아들이 법학을 공부해서 부유하고 사회적인 존경을 받으며 살기 바랬습니다. 그래서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1505 7 2일 한 여름에 친구와 길을 가다가 낙뢰로 인해 친구는 죽고, 자신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심하다가 법학을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하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단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여섯 개의 수도원 중에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당시 젊은 루터의 고민과 관심은 사람이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의 문제였습니다. 수도원에서 늘 하던대로 고백, 고해성사, 기도, 금식, 철야 기도 등 여러 가지 수행을 계속했지만, 이런 행위들로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루터의 고백,나는 더욱 거룩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양심이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비슷하였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5, 24)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곤경을 해방시켜 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루터도 결국 로마서를 연구하고 묵상하다가 복음을 재발견하고 진정한 회심을 하고, 마음의 평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결코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천주교를 정치적으로 개혁해야 되겠다는 의도성을 가지고, 당시 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개혁을 부르짖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루터는 운동권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본래의 성경적 교회로 돌아가길 원해서 개혁의 기치를 들었을 뿐입니다.

종교 개혁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삽시간에 온 유럽으로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고,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루터가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를 귀하게 쓰셨다고 믿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순수한 열정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루터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인 개혁이나 혁명을 계획했다면 결코 개혁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은 루터의 깊은 고민을 해결해 주고, 수도사였던 루터의 가슴에 불을 붙인 그 깨달음은 어떤 깨달음이었을까요?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1:16-17절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루터는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요, 성실한 사람으로써, 당시 교회에서 가르치는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종교적 수행과 여러 가지 선행이 필요라다고 믿고 부단히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높은 기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그의 좌절감도 깊어갔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깨달은 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떤 행위나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뤄 놓으셨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로마서의 핵심 진리입니다. 루터는 이 진리를 머리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행위로 의롭게 되고,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선행으로써, 인간의 노력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세상의 종교와 다르게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루터가 로마서1:16-17절에 대해 어떻게 깨달았는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 의롭게 되는데 필요한 것은 복음 하나면 족하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속죄의 제사는, 완전하여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16절을 보세요. 그 구절 속에 인간의 행위나 노력이란 말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받은 유대인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을 대표하는 헬라인들이나 차별없이 동일하게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 시대는 행위로, 신약 시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지적하고 있는 바, 구약 시대도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15: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4:2-3)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으신 것은 무슨 율법을 지켰기 때문도 아니요, 할례를 받았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할례가 생겨나기 전에, 아직 시내산 율법을 받기 전에 아브람은 순전히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복음을 믿은 것으로충분한가?

1:17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두 길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의롭게 되는 길- 이 길은 율법을 다 지키고, 양심대로 행하고, 그 어떤 악도 행하지 않고 항상 선을 행하면 혹시 의롭게 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점수로 계산하면 100점 만점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을 수 있지만, 율법을 다 지켜 만점을 맞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방법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도 경험했고, 루터도 경험한 사실입니다.

3:20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이것을 비유하자면,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대한해볍은 혹시 건널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태평양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법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방법입니다. 인간 스스로 의롭게 되는 길이 막혔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의롭게 해 주시는 새로운 길을 여신 것입니다.

로마서3:21-22절에서 이 진리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는 뜻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구약을 율법을 통해, 신약은 복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복음을 이야기하고, 사람은 누구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1: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해석하기 쉽지 않은 부분인데요, 새번역에서는 이것을 쉽게 번역하였습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난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 복음을 믿는 길 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By faith from first to last”

믿음은 쉽게 설명하자면, 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에게 그릇이 필요한데, 믿음이란 그릇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믿음의 세 가지 차원

루터는 믿음을 세가지 차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아는 차원의 믿음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인간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아는 차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유일하신 구세주로, 인간은 자신의 의나, 공로,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의, 구원, 영생을 얻을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믿음인 것입니다. 아는 것은 믿음입니다.

둘째, 신뢰 차원의 믿음입니다. 지식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분,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분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기적들은 대부분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으로 믿고 만졌을 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사랑하는 종이 중풍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가서 고쳐주려고 하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말씀만 해주세요. 그러면 제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하시면, 백부장의 종을 깨끗이 고쳐 주셨습니다.

 

셋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음에 머물지 않고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여기서 세 번째 차원의 믿음-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은 성화(sanctification)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되면, 그 이후에 의롭게 된 성도는 계속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성화의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신칭의에 대해 강조하고, 성화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실상은 루터가 성화(거룩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믿음 안에서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란 말로 성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아는 차원과, 예수님을 의지하는 관계적 차원과, 사랑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차원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로마가톨릭 교회가 그렇게 강조하고, 신약 중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 행함에 대해 적게 말함으로써 오해를 받게 된 점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복음의 발견과 이신칭의에 대해 로마가톨릭의 반론은 루터의 사상이 행함이 없는 믿음-죽은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칭의를 강조하다 보면 성화-거룩한 삶-를 소홀히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론은 루터의 사상을 오해해서 생긴 일이지만,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구원파와 같은 이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의 칭의(justification) 교리를 보충하기 위해 존 칼빈(깔뺑) 믿음으로 의롭게 된 크리스천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율법의 제3사용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루터는 율법을 주신 두 가지 목적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나는, 인간 사회의 법 질서를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양심과 같은 역할) 이것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은 사람이든 운전자는 교통법규를 지켜야 하듯이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모두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율법의 두번째 기능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자인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 탐내지 말라는 법이 있기 때문에, 탐심이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7:7, 3:24) 율법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죄인임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율법은 이 두 가지 기능 외에도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성화(sanctification)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성경 말씀(율법)이 생활 지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기보다는 통합하려 하였고, 이 전 과정을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그 이후 거룩한 삶을 사는 과정을 이끄시는 분은 바로 믿는 자에게 오셔서 함께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중요한 몇 가지 진리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첫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왜 이 교리가 중요한가? 만약 의인(의롭게 되는 것)이나 구원을 위해 인간의 행위가 강조된다면- 인간은 교만에 빠지거나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늘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 즐거움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구원은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받는다고 믿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녀처럼 마음에 평안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들어, 늘 불편함과 부담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교리는 신약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둘째, 이신칭의 교리는 반드시 성화 교리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할 행위는 없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 에베소서4:15절에서 권면하듯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이 말씀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 등 모든 면에서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도달할 수 없고, 한번에 이뤄질 수도 없지만, 날마다 그리스도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강조했듯이, 의인(의롭게 됨)은 성화로 이어져야 하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 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십계명보다도 엄격한 윤리를 요구하셨습니다. 살인하지 않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해서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간음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서도 안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립했던 사도 바울도 의롭게 되었으니 됐다고 하지 않고, 끊임없기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3:12-14절을 보세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실 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뜻에 순종할 때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는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8:12-14, “그러므러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5:16-17, 22-23,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살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늘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늘 깨어 기도할 뿐 아니라 죄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지체하지 말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난 죄뿐 아니라 마음 속으로 범한 죄까지도 회개를 통해 깨끗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즐거움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늘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을 위해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은, 인간 루터나 칼빈이 한 일이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해서 하신 것일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 자체나, 종교 개혁자들이 높임 받아서는 안됩니다. 개신교가 높임 받아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예수님이 높임 받고 찬양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중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고, 성경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길로 갈 때는 지체하지 말고 돌이켜 바른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개혁한 것에 머물지 말고 계속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잘못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만 자랑하고, 은혜만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