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전체의 요절은 지난 주일에 살펴본 19 4-6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계가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결혼식에 비유하면, 결혼 서약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중요한 말씀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입니다. 헌법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에 시내산 언약에 대해 설교하고, 이번 주부터 십계명에 대해 설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출애굽기19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시내산 강림 사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뢰와 번개, 빽빽한 구름과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연기와 속에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강림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만큼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시내산 강림에 대해 기록하면서 가지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하나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강림을 맞기 위해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림은 셋째 날에 이뤄질 것인데,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19:10-11절을 보세요.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여호와가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모세는 걸음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옷을 빠는 외에 이틀 동안 남자들은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도록 부탁했습니다.(15)

사람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도 성결하게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격식을 차리는데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 성결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준비라고 있습니다.

2)      하나, 하나님의 시내산 강림 때에 지켜할 중요한 명령은 경계선을 정하여 아무나 함부로 산에 올라오게 해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모세 외에 또는 모세와 아론 외에 누구든지 경계선을 넘어서 산으로 들어오면 죽임을 당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짐승도 경계선을 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명령이라서 오늘 본문에서 최소한 이상 반복되고 있습니다.

(1)    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2)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3)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경계선을 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계선을 넘은 자를 죽일 조차도 경계를 넘어서서는 안되기에 돌이나 화살을 쏘아서 죽여야 한다고까지 하였습니다.(13)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경계선를 정해서 절대로 경계선를 넘어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가까이 하지 않으시고 멀리 계시는 분으로 나타내시길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초월적인 존재로서, 항상 인간과 멀리 계시는 것일까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본심은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신 것으로 있습니다. 또한 성막을 짓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하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접근이 제한 것은 인간의 보호를 위한 조치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 때문이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안으로 태양을 오래 바라볼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태양을 바라보면 실명할 있습니다. 태양에 접근하며 불에 타버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다가갈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과 하나님이 영원히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결코 우리와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가까이 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구약 사건은 성막이고, 신약 사건은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성육신 사건입니다.

시내산 언약 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은 크게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가 십계명입니다. 다른 하나가 성막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한 것이고,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 있는 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흥미로은 것은 성막 구조가 시내산 구조와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시내산 강림 때에 시내산을 크게 영역으로 나눌 있습니다.

경계선을 기준으로 모세  외에는 또는 모세와 아론이 들어갈 있는 곳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넘어서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막에서 일반 백성들이 들어갈 있는 곳과 들어갈 없는 곳으로 구분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소도 또한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됩니다.

그림을 보세요.

그림 1) 시내산

그림 2) 성막

(시내산과 성막)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강림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습니다. 특정인만이 접근 가능했습니다.  

시내산에서는 모세와 아론만이 산으로 올라갈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있었습니다. 성막 안으로는 오직 제사장들만 들어갈 있었고,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들어갈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한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있었고, 하나님께 다가갈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큼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의로는 결코 접근할 없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 스스로는 구원받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약 시대엔 거룩하신 하나님께 담대히 다가갈 있는 길이 이제 열렸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써,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요단 강에서 세례 받을 , 하늘이 갈라진(찢어진) 사건-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의 막힌 것이 찢어져 하늘이 열릴 것에 대한 예고라고 있습니다.

1:9-11,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제 누구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있는 길이 열렸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0:19-20,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4:14-16절에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제 은혜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헤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더욱 은혜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영원히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종노릇하던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었습니다.

8:15,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제일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방법 제일 차이점은, 구약 시대는 제한적이었다면 신약 시대는 무제한적이란 점일 것입니다. 전화에 비유하면 구약 시대는 유선 전화 시대, 신약 시대는 무선 전화시대, 스마트 시대와 같다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모든 것이 제한 적이었습니다. 여러 민족 중에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습니다. 제사장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 백성의 특권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나 담대히 나갈 있게 것입니다.

보충하면, 구약 시대는 엄격한 성전이나 제사 제도가 있어서,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들만이 특정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갈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구약의 성전이나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으로써, 이상 필요 없게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할 있고, 예배할 있게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게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항상 함께 계시는 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항상 성령 충만과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같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사람을 자주 만나서 교제하면 서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닮는 이유입니다. (고후3:18)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면 환경과 상관없이 마음에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느끼기 때문에 환경에 따라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있습니다.  불평이 없어지고 감사가 넘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얼굴에 광채가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거룩하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성결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자주 말씀하는 것이 바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이하려면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외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서 정결하게 후에도 계속 가운데 거한다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 없을 것입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특히 앞에서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높여주십니다.

 

둘째로,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려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통해 열매 맺는 삶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5:5-6절에서는 사람이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고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안에, 내가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없음이라. 사람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어지는 구절(15:7)에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안에 거하고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구절에서 중요한 말씀은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 말씀이 나를 지배하는 삶을 ,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묵상과 말씀대로 사는 삶을 통해 말씀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려면, 성령 안에서 항상(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인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고 기도를 많이 했던 분인데, 에베소서에서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할 권면하고 있습니다.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살전5: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18:1)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또는 쉬지 않고 기도한다, 항상 기도한다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고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숨쉬는 것을 멈추지 않듯이 한순간도 하나님의 임재를 잊지 않고 성령에 민감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루를 살면서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 시간이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 예배 시간 등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세기 수도사 로렌스 형제가 했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예배 시간이나 기도 시간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의 주방에서 일하는 수도사였습니다. 50 쯤에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감자를 깍고, 밥을 짓고, 설걷이를 하면서도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일하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일이 끝난 후에도 기도로 마무리 했습니다. 주님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왔고 비결이 뭔지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연습한 결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24시간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하는 것과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 뿐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최고로 불행한 것은 성령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메마른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아무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후에 회개하면서 드린 기도에서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51:10-12, “하나님이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가 누려야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임재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아들은 둘째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한 생활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다른 종류의 탕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환영하여 잔치를 베푼 아버지를 이해할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겁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들과 함께 먹어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누려도 되는데 누리지 못하고, 의무감으로 아버지를 섬겼을 뿐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 우리가 의무감 속에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로 사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에서는 모세와 아론 이외에는 시내산 꼭대기에 임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없었습니다. 경계선을 넘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경고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죽임당할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초월자, 절대자로서 사람이 결코 가까이 다가설 없는 분임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가까이 다가오라고 초청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 인간의 완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후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성도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나의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속에 있는 것까지 털어놓을 있는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여종 하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있는 여자 사라의 자녀입니다.(4)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고백과 죄를  멀리하는 생활과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과,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렌스 형제처럼 일상 속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즐거움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