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중에 지난 주일 설교 제목과 내용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지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16장을 본문으로, “하늘의 만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신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같이 만나를 내려주신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지 귀중한 교훈을 주셨다 하였습니다.

(1)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실제로 채워주시는 좋으신 아버지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로 무려 40년간 이스라엘을 먹이신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들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시는(testing)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매일 얼마 만큼 거두어 하는지 지시하셨고, 안식일 날에는 배로 거둘 있으나, 안식일에는 전혀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를 통해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하나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것은 성숙시키기 위함과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셋째로, 만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의 양식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여러 개의 원망 씨리즈 중에서 마지막의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를 건넌 , 마라에 이르렀을 물이 써서 마실 없게 되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다음에 지난 살펴본 것처럼, 엘림과 시내산 사이의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지자,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이집트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가 그립다, 너희가 우리를 광야로 이끌고 와서 주려 죽게 하느냐?”  하나님은 하늘의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다시 때문에 원망하였습니다.  신광야에서 떠나 길을 가다가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러 장막을 쳤는데, 물이 떠어져 마실 물이 없자, 다시 모세와 다투면서 원망한 것입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광야,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여 여기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과 우리 가축들까지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한국 사람들이 죽겠다는 표현을 곧잘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도 비슷했던 같습니다.

 

계속되고 반복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있습니까?

인간의 연약함, 배은망덕, 어리석음, 변덕, 구제 불능과 같은 인간의 철저한 죄성을 보게 됩니다. 정말 인간은 철저히 부패한 존재입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이 맞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17:9)

사도 바울의 통찰은 정확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23) 시편 기자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찾는 자도 없다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잊고, 힘들고 어려우면 반복해서 다른 사람, 특히 지도자를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전혀 없는 존재가 바로 머리 검은 짐승(인간)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르비딤의 사건에서 독특한 점은 이전의 불평에 비해 격렬해졌다 것입니다. 이번에는 모세와 다투었고, 돌로 모세를 치려고까지 했습니다.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어떻게 다투었을까요? 아마 당신이’, ‘어찌하여라는 말을 하며 격렬하게 다투었을 것입니다.

17: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니다

 

사람들은 언제 다툽니까? 다툼에는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우선, 서로 이해 관계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물건이 부족할 , 줄서서 기다리는데 누가 새치기 하면 다툼이 일어날 있습니다. 서로 이해 관계가 상충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우물과 목초지 문제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같이 없게 되고 각각 땅을 정해서 헤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경우, 전쟁도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이해 관계가 달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 관계와 달리 서로 믿는 바가 달라서, 믿음, 신념, 생각, 사상이 달라서 싸우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나 이념, 사상이 달라서 싸우게 되면 싸움은 치열해 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다툼은 이해 관계가 달라서 싸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서로 믿는 바가 달라서 싸우게 케이스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이 표면적으로는 마실 물이 없어서 원망하고 있는 같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것이요, 나아가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했다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17:7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중간 부분에 보면, “그들이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계신가 하였음이라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냥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며 시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같긴 한데,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는 않은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홍해바다를 건널 때엔 하나님이 계신 같았는데,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고통을 겪을 때엔 하나님이 안계신 같이 느낀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럴 있습니다. 평상 시에는 주님이 함께 계신 같은데, 고난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같기도 하고, 안계신 같기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11:6절을 아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우선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은혜로운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다릅니다. 우상은 살아있는 신이 아닙니다. 찾아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요,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망하고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되었을까요?

17:1절에 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광야에서 떠나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광야에서 누구의 명령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에 따라서 움직이다가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구름 기둥이 멈추어섰기 때문에 거기에 장막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물이 없어서 백성이 목말라 죽을 지경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였는데, 일이 안풀리고, 고난이 찾아올 , 다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선교사가 고국을 떠나 고생하며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아내가 병들어 죽거나 자녀가 죽고, 전도의 열매도 별로 없을 , 선교사는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도 내고,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아이도 생기지 않을 , 실망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봉사 많이 하고 충성했는데, 병을 걸려 고생고생할 , 하나님을 원망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르비딤까지 와서 장막을 쳤는데 마실 물이 하나도 없어서 목말라 죽게 되었을 ,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것은 있을 있는 일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대로 했는데, 가장 기본적인 물도 주시지 않으시는가?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애가 크시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실 모세에게 구체적으로 가지 행동 지침을 주셨습니다.

17:5-6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반석 거기서 앞에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말씀을 좀더 세밀하게 나눠서 보면, 모세가  반석을 치러 ,

(1)    백성 앞을 지나서 가라고 했습니다.

(2)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3)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이 반석 위에서 모세 앞에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5)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 물이 쏟아져 나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장로들을 데리고 백성들 앞으로 가라 것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반대를 받고,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주눅들지 말고 당당히 나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함께 일할 동역자들(장로들) 있으니 함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모세- 얼마나 심적으로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가슴을 펴고 동역자들과 함께 당당하게 일하라는 것입니다.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를 잡고 가라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나가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모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모세에게 가장 힘이 되는 말씀은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반석 거기서 앞에 서겠다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모세와 함께 하겠다, 기적의 현장에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지팡이를 잡고 가서 호렙산에서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 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것이란 말씀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시해 주신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사실은 르비딤에서 매를 맞아야 했던 대상은 바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하고 하나님을 시험했던 그들이 벌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호렙산 반석이 대신 맞도록 하셨고, 반석을 때렸을 때에 물이 반석에서 쏟아져 나오게 것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복음의 모형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0장에서 놀라운 진리를 들어내고 있습니다. 고전10:4, “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반석은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지팡이로 맞고 물을 반석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인간 대신에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대신 죽으시고, 믿는 자들에겐 구원과 해방, 영생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53:4-5절은 대신 고난 받는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그가 받았는데, 은혜는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운명과 예수님의 운명이 맞바꾸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셨다는 말씀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 대신해서 죄로 삼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속량(redemption)이라는 단어가 대신 값을 치루고 해방시키신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되었느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전15:3,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본문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쳤을 , 바위 속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바위에서 터져나온 물은 성령에 대한 은유입니다. 성경에서는 갈증을 해갈해 주는 물을 성령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자에게 부어주실 성령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이 성령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은 요한복음7:37-39절입니다. “명절(초막절) 끝날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같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말씀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는 것보다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인기, 물질과 같은 것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생수와 같은 성령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축복보다 좋은 복은 없습니다. 기쁨은 돈으로 없는 것이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12:13절에서도 물을 성령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몸이 되었고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을 마신다 표현한 것은 성령을 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목말라 죽어가다가 바위에서 생수가 터져 나왔을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면서 기뻐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무엇인가 다른 것에 목말라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갈증이 해갈되고 기쁨으로 넘치는 삶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아마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자일 것입니다. 여자는 요즘 말로 하면 중독에 빠져 있었던 사람입니다. 지독한 외로움을 남자를 통해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고, 현재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는 요즘 이야기가 아니라 2000 전의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뜨거운 낮에 물을 길으로 우물로 갔다가 거기서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것입니다.

이야기의 주제가 물에서 시작되어, 선지자, 예배 등으로 옮겨가다가 여자의 본질적인 문제- 공허, 외로움,  영적인 갈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이 메시야이고, 예수님만이 영적 갈증을 해결해 주실 있는 생수되신 분임을 깨닫게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길러 왔던 사람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갔다라는 묘사에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외로움이나 열등감이나 수치심 등으로 목말라하는 영혼이 진정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구주 예수님을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세상의 어떤 것으로 만족할 없었던 삶이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극적으로 변화받은 사람의 예가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여리고 세리장인 삭개오입니다. 오늘날과 달리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 나라에서 세리장은 좋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를 위해 일하는 매국노 취급을 받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오직 자기를 지켜줄 있는 것은 돈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돈이 비전이고 돈이 존재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만족할 없었습니다. 공허했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다가 그의 목표, 그의 비전, 그의 가치, 그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그를 지켜주는 ,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 결코 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기쁨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재산 절반을 드리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비슷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는 대신에  종교를 목표로 삼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를 위해 젊음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심지어 죽이는 일에도 가담하였습니다.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평안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눈이 열리고, 자유와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만족을 주겠습니까? 세상의 무엇도 만족을 없습니다. 오직 생수만이 갈증을 해갈하고 생명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르비딤 반석에서 물이 터져나온 사건에서 배워야 했던 교훈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4:13-1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만족을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물은 안되고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르비딤에서 반석에서 물이 터져나온 사건의 놀라운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가 많은 곳에서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진노가 임해야 곳에서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날 르비딤에서 얼마나 격렬한 다툼과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시험이 있었는가 하면, 그곳 이름이 므리바 또는 맛사라고 새롭게 지어진 것만 보아도 있습니다.

므리바 다툼이라는 뜻이 있고,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5:20)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죄가 있는 곳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죄를 덮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강물 같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바닷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에 거하거나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인간의 죄가 넘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덮을 만큼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커서 어떤 것으로도 측량할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르비딤에서 장막을 쳤지만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생각할 없는 방식을 생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때렸을 때에,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믿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생수만이 만족을 있는 것처럼,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목말라하는 영혼들에게 만족을 주실 있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믿는 자에게 부어주실 성령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한 생활을 수만 있다면, 세상 무엇으로 얻을 없는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하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 쾌락 같은 것으로는 만족할 없습니다. 심지어 종교로도 안됩니다. 목마를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더욱 갈증나게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사막 가운데서도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실 있습니다. 행복과 만족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밖에 없음을 믿으시고, 날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