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일보다 관계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일은 할만한데,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데 관계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옛날부터 인간의 가장 힘든 문제가 관계의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관계는 종류의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관계는 분가분리의 관계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은데, 이웃과의 관계, 다른 성도와의 관계가 나쁜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관계가 나쁘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일4:20)

오늘 본문(18)에서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태도와 인간 관계 문제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바람(소원) 없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뭔가 달라지고 싶어합니다. 국가적으로도 변화되길 원하고, 개인적으로도 변화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변화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의 변화도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는 방향과 속도, 내용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변화를 시도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보면 얼마나 변화가 어렵고 힘든지를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변화가 늦은 예수님 곁에서 직접 보고 배웠으면서도 변화가 달팽이 같이 느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엇이 우선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핵심을 타치(Touch)하고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수준을  있다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누가 크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서열에 관한 질문을 것입니다. 본문의 질문에는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천국에 대한 오해를 하면서, 세상에 이뤄질 메시야 왕국에서 제자들 중에 누가 큰가?’라는 문제로 다투었던 것입니다.

제자로서 변화되어야 번째 영역은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죄는 교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마음과 태도를 버리지 않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라고 강경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8:1-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가 크냐?”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선 누가 크고 누가 작은 비교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안된다 강조하셨습니다. ‘돌이켜야 한다 말씀이 핵심입니다. ‘돌이키는 운전 용어로 하면 U-Turn하는 것입니다. 현재 달리고 있는 길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바른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하고, 섬김 받으려하고, 인정 받으려고 하는 마음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천국 백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8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들은 약합니다. 가장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있나요? 이이들과 함께 있으면 편하다는 것으로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겸손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맘이 편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편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혹시 교만한 사람은 아닌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 것은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남긴 유명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독교 제일의 덕목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 하셨습니다.

겸손은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고,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외향적이든, 내성적이든 하나님을 섬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만, 거만, 오만은 결코 성격이 아니예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천국의 문을 막는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서로 누가 크냐 따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제일 분이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낮아져서 섬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도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15)

권위와 권위주의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스스로 세우는 것이요, 오히려 권위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인자가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20:28)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에서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5-8)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높아지려고 다툴 것이 아니라 서로 낮아져 섬기려고 , 천국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흔하게 설교하는 주제 중에 하나가 겸손에 관한 설교일 것입니다. 왜요? 복음서에서 그만큼 자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자신을 낮추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돌이켜야 것은 어린 아이나 작은 자들에 대한 무시하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영접하듯이 영접해야 하며,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18:5-6절을 보세요. “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님이 일부러 제자들 앞에 세워둔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들뿐 아니라  성도 중에서 힘없고 보잘 없는 성도 대표합니다. 어리거나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중의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계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동일시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주님이 사랑 때문에 가장 보잘 없는 사람들과 동일시 하고 계신 것입니다.

 

실족하게 한다’ –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뜻도 있지만, 죄를 짓게 한다는 뜻이 강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주고, 죄짓게 유혹하는 죄는 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죄를 짓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연자 맷돌 - 여자들이 손으로 돌리는 맷돌이 아닙니다. 당나귀가 돌리던 맷돌입니다. 한번 깊은 바다에 빠지면 결코 다시 떠오를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용서받을 없는 , 죽임을 당할 밖에 없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죄가 그렇게 된다고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 상처를 주는 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공동체에서 연약한 지체들, 힘없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상처주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18:8-9절에서 죄의 심각성에 대해 부연 설명하고 계십니다.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과장법을 쓰신 것입니다.

만일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손과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이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에 대해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면, 우리 교회는 온통 장애자들로 이뤄졌을 것입니다. 지을 때마다 신체를 잘라내라는 뜻이 아니라 신체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각오하고 죄를 멀리하라(죄를 끊어내라) 것입니다. )

 

여러분, 싸움 중에 가장 치열한 싸움,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싸움은 자신의 죄성과의 싸움입니다. 신앙 생활은 결국에는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순진한 그리스도인들- 예수 믿으면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영적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싸움은 치열함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싸움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영원한 형벌에서 건져주셨지만, 실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의롭게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으며 때때로 넘어질 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후에도 거룩한 삶을 위해 악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성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죽기살기식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은 18:10절에서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작은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업신여기는 깔보는 것을 말합니다. 무시함으로써 인격적인 모욕,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경고의 말씀을 주신 것을 보면, 교회 공동체 속에서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 여기는 풍토는 옛날부터 있어왔음을 있습니다.

가진 자는 가진 자를 업신 여길 있습니다.

배운 자는 무식한 자를 업신 여길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있습니다. 요즘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시달림을 받는지 모릅니다. 가난하다고, 말을 못한다고, 신분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히스패닉들이 그렇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업신여길 있습니다.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직분이 있는 자는 직분이 없는 자를 업신 여길 있습니다.  은연 중에 일개 성도가 그럴 있느냐?”라는 말이 중직자 입에서 나올 있습니다. ‘일개 성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일개 성도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일개 성도죠. 성도는 성자(saint) 복수형입니다. 교회는 계급 사회가 아닙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는 계급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말한 마디가 형제 자매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명한 몸과 지체 비유에서, 어느 지체도 소중하지 않은 지체가 없음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고전12: 21-26절입니다.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였느니라.

만일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여러분은 다른 성도들을 얼마나 몸의 지체로 보고 돌보고 계십니까? 우리 중에 누가 어리거나 가난하고 무식하고 늙고 병든 사람이 있을 , 얼마나 가족처럼 생각하고 돌보려고 하셨습니까?

아이들, 초신자들, 가난한 자들 인간적으로 보면 교회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같습니다. 돈도 별로 없고, 아직 믿음도 약하고 그러니 헌금도 내지 못합니다. 봉사도 못합니다. 많은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분들, 섬김의 손길이 필요하신 분들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가장 귀한 지체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특별 보호를 받는 분들입니다. 10 하반절을 다시 보세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들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상과 칭찬을 받는 길임을 기억하실 있기를 바랍니다.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임을 기억하실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분들이면 그들의 천사들이 매일 하나님의 얼굴을 뵈겠습니까?

 

1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묻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앞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지만, 이번엔 반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라는 질문을 하시고, 잃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마리가 있었는데 마리가 길을 잃게 되었다면 아흔 아홉을 산에 두고 가서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보다 이것을 기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작은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리가 아흔 아홉 마리보다 중요하는 뜻은 아닙니다. ‘아흔 아홉을 제쳐두고 잃은 마리를 찾는 것이 좋은 목회 방법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유의 핵심은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서 연약한 , 소외당하는 , 가난한 작은 중에 하나에도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누구도 소외받는 사람이 없도록 세심하게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조심한다고 하지만,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분들이 있을 압니다.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본문으로 어떤 미국 목사와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이 제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교회의 양은 몇이고, 목자는 명입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목자는 많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문자적으로 우리 교회엔 44개의 목장과 44명의 목자가 있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 목자들이 숫자적으로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얼마나 질적으로 좋은 목자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좋은 목자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좋은 목자의 조건에 대해 가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양을 아는 목자입니다.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이스라엘에서 양은 개인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부릅니다. 그러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고,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가는 것입니다.

(2)    좋은 목자는 양에 앞서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무리의 본이 되는 목자입니다.

(3)    좋은 목자는 말씀의 꼴로 양떼를 먹이는 목자입니다.

(4)    좋은 목자는 양을 보호하는 목자(희생적인 목자)입니다.  목숨까지도 버릴 있는 목자입니다.

10:11-12,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헤치느니라

(5)    좋은 목자는 양을 잃지 않는 목자요, 잃어버린 양이 있으면 포기하지 않고 찾는 목자입니다.(10:28-29)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교회에 적용하면, ‘어린이나 노인, 가나한 사람들, 사회의 소외 계층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 것입니다. 영혼이라도 존귀하게 여기고, 잃은 양이 있다면 찾을 때까지 과감히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함을 이야기하시면서, 권위,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2:25-26,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우리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권위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자세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교회의 리더들에게 겸손과 섬김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솔선수범을 강조했습니다.

벧전5:2-3,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무리의 본이 되라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기 보다는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 달라도 서로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5: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5: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인이 서로 받아야 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이미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가족으로, 지체로)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목장에서 서로 받아들이 못하고 꺼리거나 밀어내는 지체가 있습니까? 용서하고 기꺼이 받아들으실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무슨 추상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적용하고 지켜야 실천적인 말씀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을 높이기 보다는 어린 아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죽기까지 낮추셨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야 하겠습니까? 교만할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작은 중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작은 중에 하나라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 잃은 양이 있으면 끝까지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중하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교회는 군대가 아닙니다. 서열을 중시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리혀 어린 아이나, 가난하고 없는 사람이 존중 받는 따뜻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어떨 보면, 인간이 동물들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동물들이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른다고 하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시골에서 보면, 소나 개나 , 참새들이 함께 먹이를 먹는 모습을 목격할 있습니다. 등치가 소가 등치가 작은새나 닭을 못살게 구는 법이 없습니다. 소가 끼리 싸우는 것은 보지만 소가 닭이나 개와 싸우는 것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소만도 못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연약하고 작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핍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욕심이 한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의 교회안에서도 이런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세상의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 돌봄의 원리가 작동하는 천국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 청소년들이 존중받고, 초신자와 새가족들이 환영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분들도 존중받는 하늘의 법칙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가족과 같은 따뜻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이뤄지길 소원합니다. “ 때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에게 끌리며 염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11:6-8)

비전은 하나님의 교회의 비전인 믿습니다. 어린 예수와 성령 공동체인 교회에서는 연약한 자가 강한자에 의해 짓눌리는 곳이 아니라 돌봄을 받는 , 함께 나누고 누리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마리가 있는데 중에 하나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면, 아흔 아홉을 산에 두고 가서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소외받거나 상처받지 않게 해야 하며, 잃은 양이 있다면 속히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 묻고 계십니다.

잃어버렸던 마리 양을 찾으면 마리로 인한 기쁨이 아흔 아홉로 인한 기쁨보다도 크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영혼 중에 소중하지 않은 영혼이 있겠느냐?”

 

본문 18:14절에서 예수님은 결론을 맺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작은 중에 하나라도 잃은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작은 자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6:39-40절에서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영혼들을 돌보는 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 초신자들, 가난하고 약한 성도들을 돌보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작은 자들 중에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