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호 목사님 설교문 (장신대 교수)

고후 12:7-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


어느 의미에서 50대 중반이란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과 위기를 경험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육체적으로 노쇠현상을 경험한다. 기억력이 쇠퇴하고 노안이 되어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머리가 어느덧 반백이 된 사람들도 많고, 아예 머리칼이 다 빠져 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성 인병으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남성들은 기력의 저하로 인해서, 여성들은 갱년기로 인해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상대방의 건강 안부를 물을 때에는요즘 건강이 어떠십니까?”라고 묻지 말고 부위별로 물으라는 우스개 농담도 있다. 그것은 이 나이가 되면 한 군데도 예외 없이 다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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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중반의 시기는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저명인사가 되어 국가와 사회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집에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동문회보를 보면 정치계, 관계, 학계, 경제계 등에서 고위직에 당선 또는 임명되거나 두각을 나타내는 자랑스런 동문들의 이름이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축하할 일이고 또한 동문으로서 자부심도 느낄 일이다. 그러나 5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면 사실상 많은 동문들이 이미 더 이상 승진할 곳이 없는 직위에 이르러 이미 은퇴한 경우도 있고, 승진에 실패하고 수십 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에서 퇴직하거나 또는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러 저러한 문제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인 동문들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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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대 중반의 이 시기에 우리는 인생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하강을 경험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앞만 보고 그리고 위만 보고 달려왔는데, 바야흐로 우리는 이제 어느덧 더 이상 나아갈 곳이나 올라갈 곳이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 우리는 이미 내려가고 있다. 이 시기는 인생의 가을과 같은 시기이다. 이제 곧 닥쳐올 겨울을 앞두고, 지나온 인생의 날들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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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화이트헤드는사물의 본성의 핵심에는 항상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있다고 말했다. 젊은 날에는 열정과 꿈이 중요하다. 젊은 날에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도전하여야 하며, 창조적인 인생을 꿈꾸고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러나 노년의 시기에는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그 무엇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을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감사함으로 받고 자족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며,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비극의 결실이 다가오기 전에 반드시 이것들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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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나 철학자들의 사상이 인생의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나 철학자의 사상을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생애의 시기에 따라 몇 단계의 사상적 시기들을 구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철학자 하이데거의 사상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하이데거는 이른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후기의 하이데거의 사상에는 이른바 전회(

轉回) 또는 전환이 일어난다. 전기에 있어서 그는 인간이란 현존재(dasein)가 시간성(temporality) 안에서 실존론적 결단을 통해 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후기의 하이데거는 더 이상 실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인간 주체의 실존론적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후기의 그의 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Gelassenheit”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한글로는 위임, 방임, 방기 등으로 번역되며, 영어로는 “let it go” 정도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노자의 무위(
無爲)와 유사한 개념이다. 이 단어는 근대의 초월적 자아로서의 주체성에 대한 보다 철저한 비판의 맥락에서 나온 말로서, 자아가 더 이상 능동적 주체로서 작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존재(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로부터 오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젊은 날의 하이데거는 인간이 자신의 주체적 결단을 통해 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였지만, 후기의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로부터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탈은폐(disclosure)되는 것을 인간 주체가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것을 말하려고 했던 셈이다. 이것은 노년의 하이데거의 변화된 영성을 보여준다.(그는 본래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전회와 전환의 경험이 필요하다. “Gelassenheit”란 개념은 기독교적 신앙의 용어로 재해석하자면 자아의 주체적 결단에 의한 추구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맡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의 후기에서는 젊은 날의 주체적 자아의 열정으로부터 “Gelassenheit”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주체적 결단에 의한 추구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맡김으로의 전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환이 있어야 우리의 믿음이 보다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은 우리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서 기도하기보다는, 조용한 묵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 늘 귀를 기울이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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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경쟁적이고 투쟁적인 인생을 살았던 인물은 야곱이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형 에서와 끊임없이 경쟁했으며, 사기를 쳐서 형의 장자권을 갈취했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수단방법을 가리고 않고 재산을 축적했다. 그리고 20년 만에 다시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만나게 되고 그 사자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경험을 한다. 이 얍복강 사건은 야곱의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다. 이 얍복 마루가 하나님을 뵈는 브니엘이 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야곱은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났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졌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의 자아의 깨어짐을 상징한다. 그 이후 야곱은 더 이상 자신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사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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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야곱처럼 지금까지 나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물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는 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분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별로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해도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기 성취의 욕구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는 한 우리는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는 사실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우리의 인생의 순간들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죽음의 문턱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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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가들의 말에 의하면 해발 5천 미터 이상은 신의 영역이라고 한다. 이것은 산을 오르는 자가 가져야할 겸손함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의 영역에 이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역이 어찌 단지 해발 5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일 뿐이겠는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기다리기보다 여전히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인생의 산을 올라가 정상을 정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은혜의 원리가 아니라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는 이 가을의 길목에서 우리의 자아를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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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에는 매년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지원을 하고 입학을 한다. 이 가운데에는 50대에 들어서 오신 분들도 더러 있다. 신학대학원 2010년 입시 특별전형 면접이 지난 11 7일에 있었다. 50세가 넘은 지원자들 가운데 특히 기억나는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모 대학 총장이자 이사장인 분이다. 이분은 38세에 대학을 창립하고 불타는 열정으로 지금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대학을 발전시켜 오신 분으로서 사회적으로 매우 존경받는 위치에 계신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이 신학교에 들어오겠다고 지원을 하였다. 이 분을 위해 추천서를 쓰신 교회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요점의 추천서를 썼다. “그동안 과도한 열정으로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이제 이분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쉬어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한 분은 미국 코넬대학에서 고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대만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는 분이다. 이분은 면접 도중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왔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눈물을 지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기반성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교육시키고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서 자녀와 함께 수년간 입시지옥을 경험해야 한다. 입시경쟁이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냉혹한 생존경쟁의 현실이다. 우리는 이 경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이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모든 가정의 자녀가 다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에 가깝다. 대부분의 가정의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좌절하고 방황한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과 자녀들이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일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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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며 좋은 대학 간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러한 말들은 늘 듣고 하던 말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후반부로 가면서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는 인생의 앞날의 안전과 평안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우리의 미래의 평안과 행복은 결코 투쟁과 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투쟁과 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의 참된 평안과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아직도 기독교인의 신앙의 본질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과 우리 자녀들의 앞날에 대해서도 우리의 움켜잡은 손을 놓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의 앞날을 의탁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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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실존의 문제는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이거나 둘 다이다. 첫 번째 문제는 우리가 이미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갔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더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고 심지어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30년 전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신학교에 갔을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내 자아가 부서지고 세상을 향한 모든 욕망이 함께 죽었다고 고백했다. 그때 나는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여전히 내 자아가 죽지 않고 있으며, 세상을 향한 욕망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비우기 위해 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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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문제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 마음에 시험이 들어 낙심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으로, 사업의 실패로, 질병으로, 자녀의 문제로, 이러 저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는 서로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번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행로에서 경험하는 좌절과 실패와 상처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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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해준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약 56년경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도 5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린도후서의 본문에 따르면 그는 평생 동안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시는 모종의 질병으로 추측된다. 이 질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간질병이니 안질이니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모두 추측일 뿐이다. 어쨌든 그는 평생 이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살았다.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면서도 그는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병은 고치시면서도 바울 자신의 병은 고치시지 않았다. 바울은 이 가시가 자신에게서 떠나가기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바울은 다시 이렇게 응답한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의 약함이 하나님의 약함이고 나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내가 망하면 하나님도 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씀한다. 나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 되며, 나의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이 된다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과 성공을 가져오기 때문에, 약함과 실패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간증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며, 자신이 당하는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오히려 기뻐한다고 고백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신앙인가
?

바울은 이 고린도후서를 쓴지 6년이 지난 후 그의 나이 62세 정도 되던 해에 로마 옥중에 갇혀 있었다. 이 로마 옥중에서의 시기가 그의 인생의 최후의 시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은 얼마 후 네로의 박해 때 순교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4:11-13).

바울은 자족의 비결을 터득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한다. 그는 자신이 고상함과 비천함,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 건강과 질병 이 모든 것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한다. 이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스) 그는 언제나 만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의 비결을 발견했다. 이것이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은 어떤 능력인가? 그것은 우리의 외적 상황이나 조건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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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0 29-31일 북경대학에서 학술대회가 있어서 다녀왔다. 발표를 마치고 이튿날 아침 산책을 위하여 원명원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산책을 하고 나오던 중 길가에서 즉석에서 족자에 붓글씨를 써주는 노인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를 중국어 성경에 있는 대로 한자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
我的恩典夠你用了(

아적은전구이용료).” 이 구절을 다시 한글로 풀이하면나의 은전 즉 은혜가 내가 사용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기도할 때마다 늘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족합니다. 하나님은 제게 이미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이미 과분하게 높이셨습니다. 이상 더 가지려고 하거나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않도록 제 마음을 지켜 주십시오. 제가 아무 것도 없고 비천하던 시절을 늘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끊임없이 제 마음을 비워 가난한 마음을 갖게 해주시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 인생의 가을에 마음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을 갖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난한 마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 만추의 계절에, 나뭇잎들이 떨어져 낙엽이 되어 거리에 눈처럼 날리고 있다.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무가 나뭇잎을 버린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무가 나뭇잎을 버리지 않으면 겨울을 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 새로운 잎을 낼 수도 없다. 자신을 비우는 가난한 마음, 이것이 인생의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지혜로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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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비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단지 도를 닦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족함을 깨달을 때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족함을 깨닫고 감사할 때 이기적인 육신의 욕심이 포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비움과 포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때,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자족과 감사의 마음이 솟아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자기 비움은 성령의 충만이 되며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되며, 나의 가난함은 하나님의 부요함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개념들은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충만함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육신적인 충만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인 충만함이다. 이 영적인 충만함 속에 우리 영혼의 진정한 만족과 평화와 기쁨이 있다. 이 만족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사는 복된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