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홍의 저서 '사랑하는 나의 외아들에게 남기는99가지 신앙상식중에서...

 

얼마 , 내가 가르치고 있는 캘리포니아 ABC(Artesia, Bellflower, Cerritos) 통합교육구 음악수업에 수년간 참여하고 계시는 한 목사님께 “목사님! 할렐루야가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을 수업시간에 슬며시 던졌다. 너무 쉬운 질문을 받은 목사님께서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시며 벌떡 일어나서 하시는 말씀 왈, “남원에는 광한루가 있고, 진주에는 촉성루가 있고, 밀양에는 영남루가 있고, 하늘에는 할렐루가 있다!... ^^

 

히브리어인 ‘할렐루야!’는 직역을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들은 진멸(殄滅)시켜라!”라는 뜻이다. , 전쟁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탄의 세력을 진멸시키라고 하신 지상명령이다. 그러나 의역하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이다.

 

'찬양'이란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모두 포함한 말이며, ‘복음성가’는 찬송가책 안에 있는 복음성가와 찬송가책 밖에 있는 복음성가로 나눠진다.

 

그러면 찬송가와 복음성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구분방법 >

첫째, 가사를 분석하는 것이다. 찬송가는 그 가사의 대상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이여야 하고, 복음성가는 그 가사의 대상이 사람인 것을 말한다. , 현행 찬송가책에는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복음성가의 대상이 사람인 까닭은 복음성가의 가장 큰 목적이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의 사명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이고, 복음성가는 인간 대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이다. 또한 찬송가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복음성가는 사람들이 듣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가사내용이나 음악형식, 연주태도 등이 다르기 마련이다.

 

둘째, 음악형식에 의해 비교해 보면 ‘아멘’의 유무이다. 찬송가에는 곡의 마지막에 아멘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복음성가에는 아멘이 없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셋째, 찬송가는 회중이 쉽게 부르도록 하는 데에 관심이 없으나, 복음성가는 쉽게 익히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넷째, 음악형식의 차이점은 찬송가는 하나의 가사에 하나의 음이 붙는데 반해, 복음성가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짜임새(Texture)를 갖고 있다.

다섯째, 화성(코드)의 사용에 있어서 찬송가는 장엄하고 신중한 수직적 화성진행을 하며, 복음성가는 가볍고 색체적인 효과의 수평적 화성진행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반주용 찬송가책’의 악보 위에 기록된 코드들은 11 대위법으로 편곡된 찬송가 악보의 수직적 화성(Harmonic Chord)들을 그대로 분석하여 부쳐놓은 부분들이 많은 곡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수평적 화성(Melodic Chord) 4분의 4박일 경우, 한마디에 코드가 하나 혹은 첫 박과 셋째 박에 두 개가 붙어야 하며, 2박과 4박의 약박자에는 아주 느린 곡이거나, 아주 리드미컬한 부분이거나, 혹은 특별한 경우(그다음 화음을 살짝 꾸며주는 변화화음과 감7화음)를 제외하고는 코드를 붙이지 않는다.

 

끝으로, 멜로디에 있어서 찬송가의 선율은 직선적이고 장엄한데 비해, 복음성가의 선율은 전도를 목적으로 하므로 쉽고, 가볍고, 감상적이며, 때로는 정열적이다.

 

< 예배 시, 찬송가책 밖에 있는 복음성가의 사용 유무에 관하여 >

2009 1월에 남미에서 오신 나의 셋째 형님(홍상익 교수) LA를 대표하는 큰 한인교회의 목사님께 인사차 방문한 겸에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그룹사운드에 맞추어 계속 복음성가를 찬양하였는데, 볼륨이 너무 시끄러워서 형님은 아예 자리를 맨 뒷좌석으로 옮기셨고, 나는 참고 맨 앞자리에서 끝까지 예배를 드렸다. 성가대 없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룹사운드가 찬양과 반주를 계속하였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아예 순서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찬송가는 단 한곡도 부르질 않았다. 내 평생 처음 겪어보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나의 귀에서는 “삐~”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과 두통이 일어났다. 예배당은 기분 푸는 곳이 아니다. 예배는 예배다워야 한다!

 

오늘날, 교회와 관계된 음악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바로 예배 시에 복음성가의 사용 유무다. 원래 장로교회 등의 보수교단에서는 찬송가책에 수록된 곡들 외의 복음성가는 공식적으로 정해진 예배인 주일 대예배와 저녁예배 그리고 수요 삼일절예배 시에는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예배나 구역예배 혹은 부흥집회나 전도집회 등의 특별한 모임, 또는 유년주일학교와 학생회 예배에서 부르는 것은 무방하다. 그리고 위 공식적인 예배인 주일 대예배 등의 예배 전후로 부르는 것 또한 무방하다.

 

그러나 복음성가를 하드록과 같이 너무 시끄럽게 연주한다면, 성도들의 청각과 뇌신경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지만, 그 후에 진행되는 예배 때의 섬세하고 질적이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악기 연주와, 성가대의 평화롭고 은혜로운 찬양을 들을 때에는 이미 귀가 멍해져 있기 때문에 그 찬양이 잘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찬양의 은혜조차도 받질 못하게 된다.

 

요즘 이런 시끄러운 종류의 복음성가들을 틀어놓고 마치 나이트클럽이나 온 듯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신없이 펄쩍펄쩍 날뛰면서 노래하는 청소년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은혜 받는 것과 열 받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춤(Holy Dancing)’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성령춤’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주위에 있는 대형교회의 중고등부 학생예배에 참석해보면, 학생들이 찬송가책은 소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부르지도 않고, 유행하는 복음성가만 부르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며, 전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회의 학생들이 자라나 성 인이 되고, 교회의 기둥들이 되어, 예배 시 찬송가의 은혜를 전혀 받을 수도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면 과연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끔찍하다.

 

대중음악과 같이 청각에서 오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고,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찬양에 유입시키는 것은 위험하며, 청아한 음성과 정확한 곡조로 찬송을 부르며 그 아름다운 소리를 통하여 표현되는 내용과 그 섬세한 음악을 통하여 감동을 서로 나누는 예배관습과 풍토를 회복하고 조성하는 데에 오늘날의 교회가 그 책임을 지고 앞장서야만 한다.

  

찬송가책은 비록 성경과 같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찬송가책은 신학자, 목회자, 언어학자, 문학가, 교회음악 작곡가... 등 각 교단을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면서, 노래가사의 역사적 성경적 근거, 작사 작곡가의 교단과 신앙배경 등, 4단계에 걸친 철저한 심사를 통해 선정된 곡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찬송가책 밖의 복음성가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검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배 시 사용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중에는 찬불가를 만든 사람들의 곡들도 있다.

 

물론 현행 우리나라 찬송가책에 수록된 곡들 중에서 261(어둔 밤 마음에 잠겨)과 같이 잘못 선정된 곡도 있다. 각 교단에서 추천해 올라온 곡들을 검토, 선정하여 ‘합동찬송가’책을 만들다 보니, 그 과정에서 군소교단에서 추천되어 올라온 소수의 곡들도 선정이 되어야 함으로 인해, 이 곡이 어쩔 수 없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 곡의 가사 내용을 보면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단지 한 자유신학자(김재준)가 만든 ‘민족주의적인 새마을노래 풍의 시’일뿐이다. 그래서 “종교, 특히 기독교는 분리되면 되었지,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씩 어릴 적에 부르던 ‘새찬송가’가 그리워진다. 현행찬송가 135(갈보리산 위에) 3절 가사와, 찬송가 88(내 진정 사모하는) 3절 가사와, 찬송가 405(나 같은 죄인 살리신) 등의 다시 번역된 가사들은 예전의 ‘새찬송가’ 가사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송가책과 성경책을 자꾸 통합하려고 하지 말고, 교단마다 각각 자기 교단의 훌륭한 신학자들과 성경언어학자들이 더 좋은 바른 번역으로 된 새로운 버전(Version)을 출판할 수 있도록 해야만,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NIV와 같은 훌륭한 성경책이 탄생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찬송가책에 수록된 복음성가와 그 밖의 복음성가의 차이점 >

딱 잘라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찬송가는 피가 있고, 복음성가는 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와 성령의 은혜를 말하는데, 한 예로 미국에서 교도소 장기수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한 방에 있는 죄수들에게는 찬송가 한 곡을 계속 부르게 하고, 다른 방에 있는 죄수들에게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복음성가 한 곡을 계속 부르게 했더니, 처음에는 찬송가를 부르던 죄수들은 냉랭하고, 복음성가를 부르던 죄수들은 눈물바다를 이루더니, 시간이 갈수록 찬송가를 부르는 죄수들은 눈물바다를 이루고, 복음성가를 부르는 죄수들은 냉랭해져 인상을 써가며 억지로 부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피의 유무이다.

 

피없는 제사, 피없는 예배, 피없는 찬양, 피없는 기도, 피없는 회개, 피없는 사랑, 선교, 구제, 헌금...은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시질 않으신다. ( 4 - 피없는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치 않으심)

 

< 결론 >

미국 유학을 오기 전인 대학원 시절, 나는 내가 다니던 대구동부교회의 주일 대예배 때에 복음성가를 부르게 하기 위하여, “복음성가에는 피가 없다!라고 말씀해 오신 연로하신 김덕신목사님께 복음성가의 은혜를 체험케 하려고 부단히 설득을 하며 애를 쓴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드디어 우리 목사님께서 주일아침 대예배 때, 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딱 한 곡의 복음성가를 부르신 적이 있었는데, 예배가 끝난 뒤 내가 이끌고 있던 돌샘찬양선교단 후배들과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성공했다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솔직히 ‘찬송가의 회복과 복음성가의 추방!을 외치고 싶다(하도 시끄러워서...). 이제는 성도들에게 예배를 고요히 준비하며 묵상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 다시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찬송가를 부를 때에도 예전과 같이 찬송가의 깊은 화성의 감동을 느끼면서 부르고 싶다. 드럼과 전자악기들의 소음 때문에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편곡한 그 깊은 화성을 도무지 들을 수가 없다. 기도원이라면야 이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클래식음악을 전공한 나뿐만 아니라, 오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예배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거부감이다요즘 대중음악 애호가들과 언론 매체에서도 시끄러운 전자음악에 질려서 Unplug음악(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대중음악)으로 돌아가는 추세인데 반해, 도리어 교회음악은 거꾸로 가고 있다.

 

대중가요처럼 일시적이고, 감정적이고, 끝없이 바뀌고 변화되는 수많은 복음성가들의 가사와 곡을 만든 많은 이들의 허구성을 오랜 기간을 통해 차차 깨닫고 느껴오면서,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나오는 피없는 찬양이 과연 예배에 어떤 진정한 은혜와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지에 대한 의문과 회의감이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부르려면 얼마든지 불러라! 그러나 적어도 예배시간에 만큼은 절제를 하고 다같이 찬송가를 부르자!

 

2천 년 전, 오순절 다락방에 퍼부었던 불과 같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도, 우리의 영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시원한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도, 성결하고 온유한 영을 부어주는 거룩하고 고요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도, 교회에 덕을 세우는 각종 은사들도 우리들에게는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성도마다, 그 처한 환경과, 믿음의 분량과, 믿음의 단계와, 지적 문화적 수준과, 교단이 제각기 다르기에 은혜를 받는 방법 또한 각각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한 분이듯이 분명한 하나의 원칙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교회들에게 어떠한 때에, 어떠한 장소에서, 어떠한 찬양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야할지를 똑바로 가르쳐주고 있다.

  

평생에 단 한 번의 추문도 남기지 않으시고, 수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존경을 받아오신 그 목사님은 비록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이 하신 위의 말씀 한마디가, 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뇌리에 새겨지고 있다. 머리가 하도 나빠서...

 

내 자랑이 아니라, 뉴욕서 내가 대학원 작곡과를 졸업한 아론코플랜드음대(뉴욕 시립대학교)는 음악이론과 작곡이 미국 최고의 대학이며, 또한 내가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한 쥴리아드음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연주(Performance)대학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동안 수많은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면서 계속 느껴오던 하나의 의문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용이 없는 음악들의 소리의 아름다움에만 도취한다면, 과연 이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의구심이었다. 바로 이 점이다! 베토벤과 모짜르트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아마 모든 크리스챤 음악가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실력을 가진 믿음의 음악가들이 의미없는 세상음악에서 떠나, 바하와 헨델처럼 교회음악으로 돌아와 위대한 찬양을 만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 어거스틴의 고백록 제10 33번 ‘청각에서 오는 시험’ 중에서 -

“내가 만일 찬송의 내용보다도 그 음악소리에 마음이 끌렸다면 그것은 벌 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