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죄와 싸우라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기쁨을 누리고

경험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죄와 주님을 동시에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기쁨을 동시에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천국을 동시에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서로 철저하게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우리 안에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모신다면 그 때부터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항상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빛이 있어도 그 빛을 종이나 무엇인가로 가리면 빛의

밝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의 안에 계셔도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삶을 살고 있으면

그 죄가 주님의 임재와 풍성함과 빛의 역사를 가리게 됩니다.

 

똑같이 주님을 영접했어도 각 사람이 맺는 열매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비교적 많은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별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 인하여 많은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의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험상궂고 이기적이며 교만하고

강퍅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안에 있는 주님은 서로 다른 주님일까요?

그럴리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복음을 받아들여도 마음의 밭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는 원리와 같습니다. 똑같은 말씀의 씨앗을 받고도 길가의 밭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며 흙이 얇은 돌밭은 조금 열매를

맺었지만 시험이 올때 곧 사라졌고 가시떨기 밭도 역시 조금

열매를 맺었지만 나중에는 시들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이 많은 열매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씨앗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 밭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복을 받아들이고 동일한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해도 마음 밭에 따라 우리는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계시지만 모든 이들의

속에서 동일한 상태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속에서는 아주 편안하게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의 마음속에서는 아주 고통스럽게 거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 밭을 얼마나 청소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예수님의 보혈을 적용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깨끗히 청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과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마음속의 죄들을

깨끗이 청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매우 불편하게 할 것

입니다. 주님은 빛이시며 죄와 악과 어두움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죄에 대하여 몹시 예민하며 죄를 버리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들은 사소한 말의 실수를 했을 때 상대방에게

사과하며 조심합니다. 사소한 죄를 지었어도 주님께 그것을

고백하며 용서받기를 구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점점 더

영혼이 아름답고 청결해지며 주님의 임재와 영적인 감각에

점점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죄에 대하여 아주 둔감합니다.

 

남들이 자신에게 준 상처나 무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기억하면

서도 자신이 남에게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리화하고 변호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주님의 임재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그는 주님을 가까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죄와 아주 멀리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점점 더 완악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집니다.

이들은 회개해라는 말을 들어도 도무지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너무나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하루 종일 마귀와 싸우며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도 여전히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행위들이 자석처럼 마귀와 악한 영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게 마련

입니다.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는 모기가 가까이 오게

됩니다. 죄는 영혼의 감각을 둔하게 만듭니다. 죄를 용납하는

이들은 많이 기도하고 주님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여도 뭐가

오는지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혜를 받거나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뭔가 다른 체질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상한 것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아주 둔감합니다.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죄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을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자녀들이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가난에 대해서는 고통을 느끼지만 자신의 속에 있는 음란과

정욕과 시기와 거짓에 대해서는 별로 아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이미 중증이며 주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임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은혜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회개에 대한 말씀은 부족합

니다. 오늘날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그러한 측면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렇게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은혜를 넘어서 정결함을 구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싫어해야 합니다.

죄의 즐거움과 쾌락을 거절해야 합니다.

공상을 통해서 짓는 죄도 주님은 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한 육체는 죄의 즐거움에 끌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건한 영을 가지고 육체를 제어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도님이 외롭다고 하면서 음란죄에 빠질 것 같다고

상담을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살 바에는 빨리 가는 것이 낫습니다."

성도님은 놀랐는지 무사히 시험을 극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을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는 우리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원수입니다.

그 원수를 우리가 용납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를 십자가의 원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경향이 어떻든 우리는 그 사조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그런 문제보다 죄를 끊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부자의 집 앞에 살았던 나사로는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죽은 후에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아프고 가난해봤자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영원토록 저주받은

삶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은 죄가 있는 없든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고 부하게 되는것을 강조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난이나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기심임 교만함이며

완악함이며 더러움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가르치고 있는

넓은 길을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영혼의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길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 않지만 내적인 행복감이 가득합니다.

그 길은 주님의 영광과 은총이 가득하게 임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형통이나 성공이나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라면

우리는 죄의 문제와 심각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대학에 가려고 온갖 대가를 지불하며 고통을 겪는데 죄의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치열하게 투쟁하고

기도해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승리!' '이미 죄에서 이겼다!' 그렇게 선포하는 많은 이들이

실제의 삶에서는 많은 죄를 짓고 넘어집니다. 그것은 그리 간단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며 치열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지속으로 싸워야 우리는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모든 죄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죄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내는

것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지나친 자기 연민이나 근심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죄입니다. 사소한 죄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주 조그만 먼지가 눈 속에 들어가도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죄는 그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이들은 사소한 죄를 통해서도 고통을 겪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나친 죄책감에 빠져서 항상 우울하고 비통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을

심어주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복음과 예수님의 보혈을 붙잡고 죄를 고백하며 적용하는 이들에게

는 주님께서 맑은 양심과 기쁨과 후련함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기쁨에 대해서 경험하고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처리해나가야 할까요? 회개는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자세하게 쓰려면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간단한 방법은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주님..제가 무엇을 회개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의 삶에서 주님이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까?"

 

또한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나는 내속에서 죄라고 알면

서도 용납하는 것이 있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

여러 가지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고백하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깊은 의식 속에서 느낍니다. 우리가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 하고 말하더라고 깊은 속에서는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고 화를 내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상대방이 잘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속으로는

찝찝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 행동한 것을 우리의 양심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계속 합리화하고 변호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계속 하고 있으면 정말 양십이 마비되고

영감이 죽게 됩니다. 남의 죄에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이 그랬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남의 죄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에 씻어서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내 모든 죄를 씻어주십시오' 이렇게 한번에

몽땅 회개하는 것은 게으르고 무성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뷔페 음식점에 가서 모든 음식을 한 입에 넣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죄의 씻음을 귀찮아하지 말고 하나하나 정결케 되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하나 씩 하나 씩 죄를 고백하고 주께 용서를

구하며 보혈을 적용할 때 문자 그대로 우리의 영혼은 정결해지게

됩니다. 그것은 느낌으로도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고 선명하고 예민해집니다.

찬양을 해도 전과 다르고 기도를 해도 주님과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며 성경을 읽어도 감동과 기쁨이 많이 오게 됩니다.

그것은 죄와 정화를 통해서 영혼이 아름답고 맑아졌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면서 실제적인 행동을 주님이 요구하실 때는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는 마음의 고백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행동으로 잘못한 죄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행동으로 잘못을 시인했을 때 그는 더

깊은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초신자인 어떤 분이 복음을 받은 후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

데 성경을 읽다가 밤에 외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에게 전에 잘못한 일이 생각나서 사과하러 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의 감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곧 영혼이

맑아지고 밝아지며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의 깊은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고 영혼이 맑지 않은 이들은

대체로 죄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간혹 이러한 신문 기사를 읽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몇 십

년 전에 가게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하면서 그 가게의 주인에게

그 돈의 몇 십배를 같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양심은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이고 그 갚는 돈보다 그 죄책감에서 해방된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즐거이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갚는 자도 기쁘고 받는 자의 마음도 흐뭇해지게 됩니다.

그러한 기사를 읽는 이들의 마음도 즐거워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 문제 처리도 이렇게 좋은 것이거늘 하물며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주님께 회개하고 사죄하며

용서함을 받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죄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사람들은

죄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죄를 짓다가 잡혀서 망신을 당하거나

벌을 받는 것은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 자체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죄와 함께 하지 않고 죄를 변호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성결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오늘날 어떤 사역자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보다 치유 받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사람에게도 당신의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이니 내적 치유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내적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사람에게 근본적인 상처가 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죄의 문제이며 완악함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했으며 이스라엘은

환경이 나빠서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죄와 불순종과

거스름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맑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회개를

즐겨야 합니다. 날마다 사소한 죄를 찾으며 그 벌레들을 잡아

죽여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 저주와 재앙을 가져오는

것들입니다. 암병보다 무서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죄들을

우리의 삶에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부디 죄와 싸우십시오.

투쟁하십시오. 간절하게 강력하게 죄와 씨름하십시오.

사소한 죄도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가만히 두면 그들은 점점

커집니다. 그렇게 싸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맑고 예민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과 천국의 임재에 대해서 점점 더

열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최초로 말씀을 전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하셨습니다.(마4:17)

회개는 천국의 문입니다. 부디 회개를 통하여 천국의 그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할렐루야.